지난해 6월 광주공항에 1천여 명의 인파가 몰렸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대한민국 최초로 호남에 본사를 둔 항공사의 취항식이 열린 날인데요. 정·재계 인사는 물론, 모델 다니엘 헤니 등이 참석하며 인산인해를 이뤘죠. 이 항공사는 국제선 노선의 신규 취항을 비롯해 10개의 대학과 산학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사회 공헌 활동을 하는 등 높은 성장세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항공사는 대체 어디일까요?
바로 에어필립입니다. 호남에 에어필립을 세운 주인공은 신흥 기업인 엄일석 대표였는데요. 비상장 주식 거래 회사인 필립에셋을 모체로 엔터테인먼트에 이어 항공업까지 진출하며 발을 넓혔죠. 신생 저비용항공사임에도 고액의 연봉과 복지를 제시해 경쟁사 LCC 직원들이 대거 이직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항공사의 고객센터 직원들까지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하면서, 지역의 일자리 창출에까지 공헌했다는 평도 들었는데요. 뿐만이 아닙니다. 승객이 작성한 탑승 후기를 일일히 찾아다니며 피드백을 남겨, 소통하는 대표라는 긍정적인 타이틀도 얻게 되었죠.
그러나 그는 다수의 사기 전과가 있는 다단계 업자였습니다. 지난해 12월 불법 장외주식 거래 혐의로 구속되면서 엄일석 대표의 진짜 정체가 밝혀졌는데요. 수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조직적인 피라미드형 판매망을 만들고, 허위 정보로 장외주식을 팔아 수천 명이 속한 먹이사슬로부터 돈을 거둬들였다고 합니다.
투자자들을 꾄 미끼는 바로 ‘상장’과 ‘바이오’였는데요. 조만간 상장 계획이 있다던가 신약을 개발한다는 식의 가짜 정보를 주며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속인 것이죠. 그리고 나서 엄일석 대표는 헐값에 산 비상장사의 주식을 비싼 값에 투자자에게 되팔았습니다. 자본 잠식 상태나 적자로 운영되는 회사의 주식을 구입해놓고 소설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 판매한 것이죠.
그렇다면 투자자들이 이같은 정보를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엄일석 대표의 배경 때문인데요. 그는 장외주식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고, 강연회도 여러 차례 진행했을 정도였죠. 그러나 그는 정상적인 기업인이나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신을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이라고 소개했지만, 이는 거짓이었는데요. 일전에도 다단계 업을 하다 적발되는 등 여러 사기 전과가 있었죠. 더욱 특이한 점은 아예 항공사를 설립하고 버젓이 기업인 행사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엄일석 대표가 본격적으로 광주지검의 수사 선상에 올라간 것도 항공사 취항식이 있고 난 직후죠.
일부에서는 항공사를 설립한 것도 사기 행위를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실제로 그가 판매한 비상장 주식의 목록에는 에어필립도 있었죠. 검찰에서도 항공사가 정상 운영되는 모습을 보여준 후 고가에 주식을 팔려 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엄일석 대표는 대형 법무법인과 전관 변호사 등을 대거 선임했는데요. 이 사건에 이름을 올린 변호사만 무려 26명입니다.
피해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에어필립은 엄일석 대표이사의 구속 이후,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려왔죠. 본사인 필립에셋이 폐업 절차를 밟으면서 자금 지원이 중단됬기 때문인데요. 이에 모기업과 결별하며 홀로서기에 들어섰지만, 사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적자가 누적된 상태라 직원들의 급여도 제대로 줄 수 없는 실정이죠.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동종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직원들은 스스로 20%의 급여를 자진 반납하며, 투자 유치나 매각을 타진하고 있는 형편인데요.
투자자 확보에도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지역의 건설업체와 수도권 유통업체 등으로의 인수 가능성이 거론되곤 했지만, 여전히 소문만 무성하죠. 사정이 여의치 않자 주식 매각을 통해 경영권을 넘기는 방안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여러 곳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에어필립과 함께 LCC 신규 사업자에 도전한 경쟁사 에어로케이, 플라이강원, 에어프레미아가 굵직한 투자자 확보로 최대 수천억 원에 이르는 자본금을 쌓아두고 있는 것과 대조됩니다.
최근에는 2월 5일 자로 국제선 노선을 일제히 중단했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 노선 운항을 취항한 지 3개월 만에 접은 데 이어, 이번에는 오키나와 노선까지 잠정 중단했습니다. 국제선 운항이 중단된 데는 그만큼 승객 수가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이들의 거점인 무안 국제공항은 매년 이용객이 늘어나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섰음에도, 에어필립은 예외였죠.
특가와 이벤트 등 다양한 혜택을 내세우며 수요 확보에 매진했지만, 50석 정도의 소형 항공편조차 채우지 못했는데요. 이는 결국 비용 확대로 이어져 에어필립의 재정난을 가중시켰다는 분석입니다. 에어필립은 수요가 차는 대로 두 노선을 다시 열겠다는 계획이지만, 현재로선 구체적인 일정이 제시되기 어려운 상황인데요. 다만 국내선인 광주~김포, 제주~김포 노선은 아직 정상 운항 중입니다.
이르면 이달 말 발표 예정인 국토부의 7번째 저비용항공사 신규 사업자 선정 심사도 낙관하기 어렵게 됐죠. 경영난이 LCC 면허 취득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인데요. 하지만 에어필립은 현재 납입 자본금이 150억 원으로 신규 사업자 심사 요건에 충족한 수준이어서 끝까지 심사를 받아 볼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엄일석 회장의 유·무죄를 떠나, 이번 사태는 오너 리스트가 한 회사는 물론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적절히 보여주고 있는데요. 국내 항공 시장은 물론 사회의 가치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는 항공사인 만큼, 무사히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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