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세뇌 수준의
‘한국은 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
“물 아껴 써!” , ‘한국은 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죠. 물을 쓸데없이 낭비하면 안 되는 것은 저명한 사실이지만, 한국이 ‘물 부족 국가’인 것은 또 다른 논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물 부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죠. 어딜 가나 물이 콸콸 쏟아지기 때문인데요. 이쯤 되면 ‘한국이 물 부족 국가가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환경단체나, 환경 학자들은 UN이 지정했다는 ‘물 부족 국가’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요. 수 십 년 동안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을 정도로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물 부족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고 있는데요, 어떤 것일까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은 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
3월 22일, ‘세계 물의 날’이었죠. 이 날이 다가올 때마다 언론과 정부는 ‘한국은 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라며 국민들에게 물 낭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습니다. 과거 정부들은 댐 건설을 할 때마다 이 점을 강조했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근거로도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2003년 미국의 국제 인구행동연구소(PAI)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1인당 연간 가용 수자원량(1,453m3)이 153개 국가 중 129위로 ‘물 스트레스 국가’로 분류했습니다. 꽤나 낮은 등수이죠. 수치만 보면 상당히 심각해 보입니다. 몇 년 뒤 UN인구국은 물 관련 보고서에 이 수치를 인용하는데요. 이 때문에 위의 발언을 UN이 했다고 굳어졌습니다.
또한 UN이 발표한 ‘물 스트레스(Water Stress)’를 한국에서 ‘물 부족(Water Shortage)’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생긴 해프닝입니다. ‘물 부족’은 ‘물 스트레스’보다 조금 더 상위의 ‘물 기근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 부족 국가’라는 것은 식수가 거의 없는 아프리카나 사막 지역을 일컫죠.
그러나 PAI는 UN의 산하기관이 아니라 민간단체에 불과합니다. 보고서에 실릴 정도로 공신력은 인정받았을지 몰라도, 그 조차 단순히 강수량을 인구수로 나눠 비교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죠.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PAI의 계산법으로는 당연히 물 스트레스 국가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 풍요 국가’?
2006년 세계 물포럼에서 발표한 ‘물 빈곤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 147개 국 가운데 43위입니다. 이 수치로 보면 물 자원에 대한 위험도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물 빈곤 지수는 1인당 수자원 양뿐만 아니라 수자원 접근율, 사회 경제적 요소, 물 이용량, 환경 등을 고려해서 측정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의문점은, 그렇다면 ‘한국에서 가뭄은 왜 발생할까?’라는 것이죠.
그 이유는 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봄, 가을, 겨울에는 강수량이 굉장히 낮죠. 따라서 지역에 따라 일시적으로 가뭄이 발생할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위험하지 않은 수준입니다. 또한 가뭄이 들면 정부는 환경 유지용수부터 공급을 줄입니다. 따라서 가뭄이 들면 하천이 마르고, 논부터 말라붙게 되는 것이죠.
2019 UN “한국 ‘물 스트레스 국가’”
UN은 2019년에도 한국을 ‘물 스트레스 국가’로 분류했습니다. 이번 평가에는 물 스트레스(%)를 100*(담수 수자원 취수량)/(전체 수자원 – 환경 유지용수)로 계산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쉽게 말해 전체 담수 수자원 중에 어느 정도를 끌어 쓰는지 비율(%)에 환경 유지용수 부분을 고려한 것입니다. 한국은 2005년 기준, 담수 수자원 중 41.7%를 끌어다 쓰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따라서 물 스트레스 지수는 57.6%로 산출되었죠. 이렇게 지정된 이유는 국토 면적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토의 70% 정도가 급경사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도 많은 수자원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렇게 수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물을 끌어쓰는 비율이 높아졌고 ‘물 스트레스 국가’로 분류된 것이죠. 결론적으로는 계산법에 따라 한국의 ‘물 부족’양상은 변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 자원을 두고 논란이 계속 발생하는 이유도 초점을 어디에 맞추냐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수자원 부족, 왜 못 느낄까?
앞서 말했듯이 한국이 수자원이 부족한 것은 맞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못 느끼는 것은 웬만한 가뭄에도 수돗물은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상수원 관리를 굉장히 잘하기 때문에 한국은 수질이 꽤나 좋습니다. 수돗물을 식수로 이용해도 별 탈이 없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죠.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수도가 잘 발달함에도 불구하고 물에 석회가 섞여있어 식수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물을 수입하기 때문입니다. 식수 말고도 ‘물 발자국’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상수’를 수입하는데요. ‘물 발자국’은 생활용수 사용량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농산물과 공산품 등의 생산에 들어가는 물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쇠고기 1kg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데 들어가는 물은 1만 5500L나 됩니다.
하지만 만약 미국에서 쇠고기 1kg를 수입한다면? 한국은 1만 5500L를 아낄 수 있는 셈이죠. 이 말은 물을 미국에서 1만 5500L 수입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가상수’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직접적인 물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소비될 물의 양이죠.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수자원은 부족하지만 그만큼 관리와 기술이 뒷받침되어서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 낭비를 하면 안 되겠죠. 지구의 총 물 중에서 무려 97.33%가 바닷물이고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담수는 2.67%밖에 안되기 때문인데요. 바닷물을 담수로 변환하는 기술이나, 역삼투압으로 해수를 정화하는 기술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많은 국가가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지구를 위해서라도 물을 아껴 써야 하는 건 맞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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